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젤 참사 (문단 편집) == 사건 진행 == 당시 유럽 프로축구는 [[독일]] [[분데스리가]]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[[잉글랜드]]의 풋볼 리그 디비전 1[* 현재의 [[EFL 챔피언십]]으로, 당시엔 EFL 챔피언십이 1부리그였다. 현재의 체계가 잡힌 건 [[프리미어 리그]] 출범 이후.]과 [[이탈리아]]의 [[세리에 A]]가 세계 최고의 리그 자리를 놓고 다투던 상황이었다. 그리고 1984-85 시즌 [[UEFA 챔피언스 리그|유러피언컵]][* [[UEFA 챔피언스 리그]]의 전신.] 결승에서 두 리그를 대표하는 양대 거두인 [[리버풀 FC]]와 [[유벤투스 FC]]가 만났다. 리버풀의 팬들은 당시 [[훌리건]]으로 유럽 대륙에 악명을 떨쳤고, 유벤투스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울트라스를 거느렸다. 거기다 결승전이 벌어지는 보두앵 경기장은 1930년에 지은 낡은 구장이라 안전상 문제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사건은 예견된 셈이었다. 특히 양 서포터들의 구역을 가로막는 벽도 없었고 출입구도 별로 없었다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Heysel_plan.png]] 경기 전부터 이미 서포터 배치에 문제가 있었다. X 구역과 인접한 Z 구역에 중립 팬들이 자리잡을 예정이었지만, 여기에 유벤투스 팬들이 뒤섞였다. 특히 X구역과 Z 구역 사이의 경계에는 격리벽이 없고 쇠로 된 자그마한 경계 울타리와 경찰들로 이루어진 경계선만 있을 뿐이었다. 그래서 양 서포터들은 서로를 야유하며 돌팔매질을 하였다. 경기가 시작되자 서포터들이 서로에게 [[돌팔매]]질을 더욱 심하게 했다. 그러다가 어느 순간 흥분한 리버풀 팬들이 울타리와 경찰을 넘어 상대편을 향해 뛰어들어갔는데, 그들이 공격한 대상 중에는 일반 관람객들도 있었다.[* 닉 혼비의 '피버 피치'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까지 잉글랜드 훌리건들에게는 상대편 서포터석으로 넘어가 관중석에서 단체로 달리는 관습이 있었다. 특별한 것은 아니고 상대를 놀래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.] 이에 대응해 유벤투스 서포터들도 맞섰지만, 결국 피해를 본 것은 유벤투스 서포터와 일반 팬들이었다. 리버풀 서포터의 공세에 밀리며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도망가다가 결국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낡은 Z 구역의 외곽 콘크리트 벽이 무너지고, 그 벽에 기대던 사람들이 떨어지며 서로 깔리면서 '''39명이 사망하고[* 이탈리아인 32명, 벨기에인 4명, [[프랑스]]인 2명, [[북아일랜드]]인 1명] 6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.''' 이 사건으로 훌리건 29명이 구속되었는데, 구속된 리버풀 팬 14명 중 7명은 징역 3년, 나머지 7명에게는 집행유예 3년 처분을 받았다. 5개월 간 추가로 재판하여 리버풀 팬 10명이 무죄를, 당시 사태를 방관했던 벨기에 공무원 두 명[* 1명은 Z 구역 담당 경찰관, 1명은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 쪽 관계자]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. 또한 [[유럽 축구 연맹]]에서도 잉글랜드 클럽팀들에게 '''향후 5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''', 사건을 일으킨 리버풀에게는 '''향후 7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'''[* 그나마도 처음에는 10년 금지였다가 조금 완화된 것이다.]라는 중징계를 내렸다. 경비를 소홀히 했다고 경찰에게도 피해자 가족들이 소송을 제기했지만, 결국 문제의 원흉이 리버풀 서포터로 밝혀져 기각되었다. 구속된 훌리건들은 살인죄로 기소되기까지 했다. 자세한 사항은 영문 [[위키백과]]에서 볼 수 있다.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Heysel_Stadium_disaster#Confrontation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